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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기간 원인 / 유엔군 & 국군의 반격 _ 역사, 영원한 상처

(`・Д・)ノ=☆ 2021. 5. 28. 00:45

625 전쟁 기간 원인 / 기습 남침

 

625가 일어난 원인은 남북한이 각각의 다른 정부가 수립되었기 때문으로 보고 있습니다. 남한에서는 사회주의 활동을 추구하였고, 반대로 북한은 자본주의 활동을 반국가 단체 활동으로 규정하면서 양측 간 불신과 반목을 키우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많은 상처를 남긴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개시되었습니다. 이후 1953 7 27 최종적으로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 전쟁기간은 만 3년 1개월 2일간 계속되었습니다.

 

이 기간동안 쌍방은 38도선을 각각 3회씩 넘나들면서 남쪽으로는 낙동강까지, 북쪽으로는 압록강까지 오르내리면서  국토의 80% 해당하는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습니다. 6.25전쟁 기간중에 전선이 크게 변화된 것에 따른것을 시기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625 전쟁 기간 구분

 

첫째 단계 : 북한군의 남침기(1950. 6. 25. ~ 9. 15.)

북한군이 38도선을 돌파하여 낙동강 선까지 이르렀던 시기를 뜻하고 있습니다. 

 

둘째 단계 : 유엔군의 북진 반격기(1950. 9. 15. ~ 11. 25.)

한국군과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 이후에 낙동강 전선으로부터 38도선을 넘어서 만주 국경의 초산-혜산진 선까지 진격을 했던 시기를 말합니다. 

 

셋째 단계 : 중공군의 침공 유엔군의 재반격기(1950. 11. 25. ~ 1951. 6. 23.)

중공군이 개입을 하고 단행된 공산군의 대공세로인해 유엔군이 평택-제천-삼천 (37도선)까지 후퇴를 한 다음 재반격을 하는 작전으로 38도선을 회복한 기간을 말합니다.

 

넷째 단계 : 휴전협상과 교착전기(1951. 6. 23. ~ 1953. 7. 27.)

휴전회담이 진행됨과 더불어서 쌍방이 38도선 부근에서 고지쟁탈전을 전개하며 휴전에 이르는 기간을 말합니다.

 

단계 진출선 진출기간
북한군의 남침기 38도선 > 함안 > 왜관 > 포항 1950.6.25 ~ 1950.9.15
유엔군의 반격 및 북진기 낙동강선 > 정거동 > 초산 > 청진 1950.9.15 ~ 1950.11.25
중공군 침공 및 유엔군 재반격기 압록강선 > 평택 > 제찬 > 삼척 > 문산 > 화천 > 간성 1950.11.25 ~ 1951.6.23
전선교착 및 휴전 38도선 > 판문점 > 철원 > 남강 1951.6.23 ~ 1953.7.27

 

 

 

 

1단계 : 북한군의 남침기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받은 국군은 우선적으로 전방을 방어하기 위한 병력만으로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면서, 후방에 주둔한 사단을 긴급하게 전방으로 이동시키면서 대응했지만, 북한군은 결국 38도선을 돌파했고 6 28 서울과 춘천, 강릉을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국군은 한강 이북지역에서 철수를 한 병력과 이남 지역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력을 통합한 후 임시로 편성된 시흥지구전투사령부의 지휘 아래 한강방어작전을 수행했지만, 결국 7 4 한강선을 북한군에게 돌파당하면서 평택으로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중부전선에서는 7 2 북한군에 의해 원주가 점령되었고, 동부전선에서는 7 4 삼척이 점령되면서 지연전이 계속 됐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세계에서는 유엔군 파병이 결정되었고 유엔군의 일원으로서 24보병사단의 스미스특수임무부대가 오산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었으며, 국군은 7 4 평택-제천-울진을 연하는 선에서 유엔군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였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여전히 전투력의 열세를 만회하지 못한 상태에서 지연전을 진행하게 되면서 8 1일에는 낙동강선인 마산-왜관-영덕을 연하는 선까지 물러나게 됩니다.  사이 유엔군사령부가 창설되었고 유엔군에서는 제해권과 제공권을 확보하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유엔군의 작전지휘체제와 기반이 갖추어졌습니다. 때에는 국군 또한 2 군단 5 사단으로 재편성 되면서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의 병력 수준으로 전력을 회복할 수 있었고 최소한의 전투경험도 쌓아 나갔습니다.

 

 반면에 남한을 기습한 북한군은 동안의 계속된 공세로 인해 병력의 손실을 크게 입으면서 전투력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유엔 공군에 의하여 보급로가 차단되기도 하면서 전력이 급격히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북한군의 공세작전이 거의 한계점에 이를 무렵에는 국군과 유엔군이 국군 5 사단과 미군 3 사단을 마산-남지-왜관-낙정리-영덕에 걸쳐 240km에 이르는 낙동강 방어선에 배치하였고, 압축된 방어지역에서 전세를 만회하기 위한 방어태세를 취했습니다.

 

 북한군은 낙동선까지 진출하면서 총력을 기울였고, 8 5일부터는 이른바 '8월 공세'와 '9월 공세'를 감행하면서 낙동강에 배치되었던 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려 애썼지만 [함안-창녕-왜관-영천-포항] 선을 넘지 못했습니다. 이에 북한군은 많은 손실을 입었지만, 국군과 유엔군은 전력의 보충과 증원부대 가 계속해서  도착함으로써 전투력에서 우세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북한군은 낙동강 선에 도착하면서 국군과 유엔군이 보여주는 강력한 저항에의해 부딪히게 되었고 남침을 공격한지 82 만 이었던 9 15 이후 부터는 국군 과 유엔군의 총반격이 시작되었습니다.

 

 

 

 

2단계 : 유엔군의 북진 및 반격기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전선에서의 총반격작전을 시작했습니다. 인천상륙부대였던 미 10군단은 9 15일, 인천상륙에 성공을 한 뒤  이튿날에는 경인가도로 진출하게 됩니다. 이후 9 18일에는 김포를 점령할 수 있었고, 9 19일에는 한강선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도하작전을 펼치며 서울을 탈환하기 위한 작전을 개시하였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천상륙작전'에 뒤를이어 9 16일에는 8군도 총반격작전을 개시하기 시작했고, 약 1주일 동안 치열한 전투가 이어진 끝에 9 22~23일, 북한군이 지키고 있던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결국 북한군은 9 23 이후 모든 위치의 전선에서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놓치지 않고 유엔군은 경부축선과 호남우회로를 따라서 진격했고, 국군은 중부 / 동부 지역에서 중앙선 축선과 동해안 도로를 따라 진격하면서 90일 만에 서울을 수복하고 97 만에 38도선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 이남지역을 회복하였고, 10 1일부터 10 11 사이에에는 군단별로 나누어 각각 38도선을 넘어가 북한지역으로 총반격작전을 개시하였습니다. 이러한 진격은 비교적 순조롭게 실행되어 동부의 국군 1군단은 10 10일에 원산을, 17일에 함흥을 점령하게 되었고, 서부의 1군단은 10 19일에 평양을 탈환하였습니다. 그리고 중부의 국군 2군단은 10 18 양덕을 거쳐 10 23일에는 청천강선까지 도달하였습니다.

 

  국군 유엔군은 청천강선에 도달하였고 10 24일에는 한· 국경선을 향한 총공격작전을 개시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날인 10 25 공군의 기습공격을 받게 됩니다.  결국 국군과 유엔군은 공세가 좌절된  꽤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11 7 청천강 선으로 철수를 하였고, 11 24일 다시금 총공세를 감행했습니다. 하지만 또 다시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게 됩니다.

이로 인해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이 대대적으로 전쟁에 개입한 사실을 알게 되었고, 예상치 못한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해 반격작전을 개시한 71 만에 계획을 바꾸어 철수작전을 실행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3단계 : 중공군의 침공 및 유엔군의 재반격기

 

국군과 유엔군은 세를 갖출 세도 없이 11 30일을 고비로하여 철수에 속도를 붙였습니다. 서부전선에 있던  8군은 12 4 평양에서 철수를 하기 시작했고, 12 중순에는 38도선 북방까지 후퇴를 하였으며, 12월말에 가서는 임진강-연천-춘천- 북방-양양을 연하는 38도선 부근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대비한 방어선을 형성하였습니다.

 동부전선을 지키고 있던  10군단과 국군 1군단은 중공군에의해 퇴로를 차단 당하는 사건이 생기고, 어쩔 수 없이 흥남으로 철수를 했고 12 14일~24일간에 부산으로 해상 철수하였습니다.

 

12 하순에 이르러 공산군은 38도선 북방에 닿았고, 연말인 12 31일에는 38도선을 돌파하기 위해 공격작전을 개시하였습니다.  공격을 중공군의 3 공세, 신정공세라고 불렀습니다. 이 공세로 인해 국군 과 유엔군은 전투를 치르면서 또 다시 38도선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1951 1 4일에는 다시 서울을 빼앗기는 일이 발생, 7일에는 평택-삼척선으로 후퇴를 한 후 새로운 방어선을 편성했습니다.

 

 

 

 

중공군은 1 8 수원-여주-강릉선까지 진출 하였는데, 그 동안 있었던 전투로 인해 전력손실이 발생하였고 공격역량이 한계점에 도달하게 됩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이를 간파히거 1951 1 25일을 기하여 반격작전을 개시하였습니다. 한강 남안-횡선선에 이르러 다시 중공군의 반격에 부딪쳤지만 지평리, 원주일대에서 중공군을 격파하면서 진격을 이어갔습니다.

 

이때 국군 유엔군은 3 15일, 서울을 다시 탈환할 수 있었고  기세를 몰아 3 말 경에는 다시 38도선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리고 중공군의 다섯 번째 공세, 춘계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중공군이 마지막으로 최대병력을 동원하여 개시한 공세로서 당시 중공군의 가용병력은 4 병단 16 군단 51 사단의 큰 규모였습니다.

 

중공군은 북한군을 동원하여 공세를 펼쳤지만 국군 과 유엔군의 사력을 다한 저지로 인해 공산군의 공세는 구파발-홍천-하진부리-강릉을 연하는 선에서 멈추게 됩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계속된 반격으로 5 말에 이르러 세 번째로 38도선을 회복할 수 있었고, 6 15일에 문산-연천-철원-김화-화천-간성 주요 지역을 점령한 후 공습에 대비한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였습니다.

이 때부터 소모적인 전투만 반복하게 되었고 결국 쌍방은 38도선 부근 새로운 전선에서 대치를 하였고, 당시 소련의 제의로 인해 7 10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열렸습니다.

 

 

 

4단계 : 전선교착 및 휴전

 

휴전회담이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이 될 때는 전선이 소강상태를 유지했지만, 휴전회담이 결렬되거나 지연되는 상황에는 또다시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습니다. 휴전회담에서 가장 살벌한 논쟁을 벌인 의제는 군사분계선을 설정하는 부분과 포로교환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유엔군측에서는 당시 쌍방의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결정할 것을 주장했고, 공산군측은 38도선을 주장했기 때문에 회담은 제자리에 멈춰있었습니다. 회담이 결렬되자 유엔군에서는 휴전할 당시의 접촉선을 휴전선으로 결정하는 안을 관철시키기로 하고, 휴전회담을 진행할 당시에 방어선을 개선할 목적으로 제한된 범위의 공격작전을 시행했습니다. 이 공격은 겨울이 되기 전, 10월 말까지 계속되었고 당시 대치선의 평균 10km내에서 치러졌고, 꽤 좁은 지역안에서 많은 전투가 일어나면서 양측간에 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공산군은 피해가 늘어가고 전선이 점점 밀리자, 결국 10월 25일 휴전회담에 응하면서 유엔군이 제시한 안을 수용하였고, 회담 장소는 판문점으로 변경 되었습니다. 

 

 

 

 

1952년 후반에 들어사면서 전선은 또다시 가열되기 시작했고 휴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고지쟁탈전이 결렬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대표적인 고지쟁탈전으로 백마고지전투 / 불모고지전투 / 저격능선전투 / 크리스마스고지전투 / 수도고지전투 / 단장의 능선전투 / 펀치볼전투 / 피의능선전투 / 351고지전투 등이 있습니다. 이 전투들 제한된 지역내에서 일어난 것이긴 하지만 지역을 수없이 뺏고 다시 빼앗기는 공방전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쌍방 모두 많은 인명피해를 얻었습니다.

 

 고지쟁탈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동안 1953년 3월 5일 당시 소련의 스탈린 수상이 사망하였고,  4월 부터 휴전회담이 다시 재개되었으며 6월 8일 포로송환협정이 타결되면서 길고 길었던 휴전협상의 모든 의제가 합의되기에 이릅니다. 이에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에 휴전협정이 조인되었고, 당일  밤 10시를 기준으로 모든 적대적인 행위를 종식시키는 휴전이 성립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38도선 일대의 분계선을 대신하여 임진강 하구-판문점-철원-거진 북방을 연결해주는 선에 남북으로 폭 4km를 이루는 비무장지대가 설치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