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한국전, UN 참전국 의료지원국
한국전쟁 기간 :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625 전쟁 (한국전) 이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전쟁 기간은 1950.06.25 ~ 1953.07.27 로 기습공격부터 휴전까지 만 3년하고 1개월 이틀 간 진행이 되었습니다. 한국전쟁은 영토의 무려 80%를 왔다갔다하는 대규모 전쟁으로 수많은 사상자와 아픔을 낳은 역사입니다.
6.25전쟁 참전국가수는 총 22개국으로 유엔 회원국들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각국에서 처한 안보상황 등을 고려하여 한국으로의 파병을 결정했고, 의료지원부대를 파견한 국가들은 유엔헌장에 명시되어있는 “세계의 평화와 자유를 수호한다"는 대의를 따라서 한국전 참전을 결정했습니다.
한국전쟁 625 참전 16개국 (전투)
아메리카 : 미국, 캐나다, 콜롬비아
유렵 : 그리스,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벨기에, 영국, 터키, 프랑스
아프리카 : 남아아프리카공화국, 에티오피아
아시아/오세아니아 : 뉴질랜드, 태국, 필리핀, 호주
미국
미국의 한국전 참전 병력은 다른 유엔 참전국에서 파견 된 군대를 모두 합한 것보다 몇 배나 많은 규모였습니다. 미 육군은 전쟁 기간 중에 최고 30만 명에 육박하는 전투병력을 한국에 주둔시켰고, 이들이 시행한 작전은 사실상 625전쟁의 전체 작전이었다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였다고 합니다. 미 해군은 항공모함, 순양함, 전함, 구축함, 잠수함 및 지원함이 참전하여 전쟁이 발발한 이후 10일째 되는날인 7월 4일부터 북한 해안을 봉쇄하면서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미 해군은 공중폭격, 함포사격, 상륙병력 수송, 미 본토로부터의 병력, 물자수송 등 여러동을 진행하면서 전쟁을 유리하게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특히 인천상륙작전과 흥남철수작전에서 완전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미 공군은 극동공군의 통제 아래 북한군과 중공군의 작전수행 능력을 해제시키기 위해 폭격을 했고 유엔 지상군이 작전을 보다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근접지원 작전을 펼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캐나다
캐나다는 북한의 배후에 소련의 팽창욕구가 있다는 판단을 하고, 유엔에서 이를 강력하게 저지를 하는것이 필요하다고 선언했습니다. 캐나다는 터키처럼 여단급 규모를 가진 병력을 파견했고, 최초로 파견된 제2대대(PPCLI)는 영국 제27여단에 소속이 되어 함께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콜롬비아
콜롬비아는 1개 대대를 파병하고 싶은 뜻을 밝혔지만, 당시 자국의 경제 사정문제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참전을 함에 따르는 무장/훈련/보급 등의 여러 문제들로 인해 미국과의 오핸 협상기간이 생겼고, 실제 참전은 늦어지게 되었습니다.
콜롬비아는 해군함정을 우선으로 파견했고, 육군에서는 참전국가 중 제일 늦은 시기인 1951년 6월 16일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참전 규모(프리깃함 1척, 지상군 1개 대대)는 작은편이었지만 라틴아메리카의 유일한 참전국이었습니다.
그리스
지리적으로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로 연결이 되는 전략적 요충지였던 그리스는 세계대전이 종료된 이후에도 소련과 그 위성국의 강력한 지원을 받는 국내에 있는 공산당과 내전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는 한국전에 지상군 1개 대대와 수송기 1개 편대를 파병했습니다.
1950년 12월 9일 부산에 도착한 그리스 대대는 적응훈련을 마친 후 미 제1기병사단에 속하여 격전을 치렀습니다. 이천 부근 381고지 방어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리면서 전투력을 인정받았고, 이후 적의 주요 거점이었던 임진강 부근에 있는 고양대/대노리고지를 두고 수차례 공방전을 치렀습니다.
그리스 제13수송편대는 1950년 12월 1일 일본에 도착해서 장진호 전투를 지원사격했고, 미 해병사단을 직접 지원하여 전/사상자를 후송하며 전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네덜란드
네델란드는 대대급의 전투부대로 고도로 훈련되고 책임감이 투철한 부대였으며 영어 소통이 되는 장병이 많아서 미군과 원활한 협조가 진행됐습니다. 네델란드 대대는 1950년 10월 24일 한국땅에 도착해서 12월 말까지 적응훈련을 마쳤고, 이후 미 제2사단에 배속되어 중부전선에서 격한 전투를 수행했습니다. 이 대대는 원주에서 북한군 제5군단 예하부대와 치열한 전투를 가졌고, 결국 북한군 1천 1백 명을 살상 혹은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룩셈부르크
룩셈부르크 소대는 한국전 유엔 참전국 중에서는 그 규모가 가장 작은 부대였습니다. '참전을 희망하는 국가라 할지라도 그 병력은 작전에 기여할 수 있는 정도로 최소 1천 명은 돼야 한다'는 입장이 전달되었지만 이러한 최소 기준에서 유일하게 예외가 된 국가가 바로 룩셈부르크였습니다.
룩셈부르크는 국가 인구가 20여 만 명 밖에 되지 않아 많은 병력을 파견하는것 자체가 곤란했고, 사전에 벨기에와 협의하여 벨기에 대대에 1개 소대 병력을 포함시켜서 육이오 한국전에 참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결국 그 제안은 받아들여졌습니다. 룩셈부르크 소대는 전쟁 기간 동안 48명의 병력을 유지하면서 벨기에 대대에 소속되오 함께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벨기에
벨기에는 1951년 수많은 전투를 통해 그들이 가진 전문적인 전술능력을 아낌없이 보여 주었습니다. 2월 공세 때, 벨기에는 중공군의 공세에 맞서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좌측의 영국군 대대가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고립될 위기에 빠질뻔 한것입니다. 이때 벨기에 대대를 지휘하던 크레하이 중령의 적절한 지휘에 의해 금굴산을 지키면서 철수로를 확보하며 전곡으로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벨기에 대대는 이틀동안 금굴산 진지를 방어하면서 중공군이 진출하는것을 막았고 영국의 철수를 도왔으며, 큰 인원손실 없이 전장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영국
영국의 참전은 유엔군이 창설되기 이전에 이루어졌고, 미국에 이어서 두 번째로 큰 규모로 병력을 한국에 파견했습니다. 영국은 영연방 국가의 부대들이 한국에 도착하자 전부 통합을 하여 1951년 7월 28일 영연방 제1사단을 창설했습니다. 영연방 제1사단은 영국을 비롯하여 호주/캐나다/뉴질랜드/벨기에/룩셈부르크 6개국 군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터키
미국 & 영국을 제외하고서 육군을 여단급 규모로 파견한 국가는 터키 그리고 캐나다였습니다. 터키는 한때 중립을 적인 모습을 표방하기도 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말 친 서방정책으로 선회를했고, 북한의 남침 사건 직후 한국에 대한 유엔의 군사원조 결의안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며 짧은시일 내에 4천5백 명이라는 규모의 파병을 결정하면서 유엔 회원국들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터키군은 군우리 전투를 치르면서 많은 희생자를 냈습니다. 장병들은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면서, 착검을 한 채 적진으로 돌격하여 부대의 강한 군기를 보여 주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당시 프랑스군의 대대장이었던 몽클라르 중령은 특이한 경력을 가진자였습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당시 자유프랑스군의 장군으로 종군했는데, 종전 때 그의 계급은 중장이었습니다. 그는 종전 이후 예편을 했는데, 육이오 한국전이 일어나고 프랑스 정부에서 대대급 규모의 파견부대를 구성할것이라고 하자 이 대대를 자신이 지휘할 수 있기 바라면서 중령 계급으로 다시 현역 복귀를 신청합니다. 프랑스에서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곧 그는 프랑스 대대의 지휘관이 되었습니다. 그의 계급은 중령이었지만 유엔군사령부 측과 미제8군의 장병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몽클라르 장군'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유엔에 적극적인 참여를 하는 나라였습니다. 전투비행대대 파견을 결정하고 9월 4일 더반 항을 떠나 40일 이라는 긴 여정 끝에 11월 5일 요코하마에 도착하게 됩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유엔 참전국 중에서 유일하게 공군부대만 파견을 한 국가입니다. 비행편대는 청천강 북쪽 상공으로 출격하여 적들의 병력집결지와 야전보급소를 공격했지만, 착륙을 하던 전투기 2대가 좋지 않은 활주로로 인해 충돌하는 피해를 입게 됩니다. 이 후 대대는 북한 지역에있는 철교와 육교, 터널 등을 폭격하며 차단작전을 수행하면서 전장에서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에티오피아
1935년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로부터 침공을 당했던 적이 있어서, 이런 역사적인 경험으로 인해 '유엔이 강력한 집단행동으로 세계평화를 유지해 나가야 한다'는 결의를 보이는 국가 였습니다.
한국으로 출발한 에티오피아 대대는 1951년 5월 6일 도착 후 미군에서 제공해주는 무기를 가지고 재무장하였고 8주라는 비교적 길다면 긴 적응훈련 기간을 거쳤습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에티오피아 대대는 그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현대적 장비와 전술에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최선을 다해 훈련에 임하면서 훈련의 후반무렵에는 사용되는 통신장비와 수송장비들을 다루는 데 다른 유엔군 수준과 비슷한 정도이거나 오히려 더 높은 숙련도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대대는 전방으로 배치된지 사흘 만에 화천 봉당덕리 지역에서 중공군과 첫 번째 교전을 벌였습니다. 대대는 4시간에 걸친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렸고, 그 후 중부전선에서 중공군의 공세를 저지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뉴질랜드
뉴질랜드 정부 또한 '유엔결의에 따라 함정을 파견하겠다”며 참전 의사를 밝혔습니다. 이후 프리깃함 2척이 1950년 7월30일 한국에 도착하였고 이 후 본격적인 해상작전을 펼쳤습니다. 뉴질랜드 해군은 휴전이 때까지 총 8척의 함정을 번갈아가며 투입하면 작전을 진행했습니다. 또한 포병부대를 파견하면서 화력의 힘으로 유엔작전에 기여했습니다.
태국
태국은 아시아에서 첫번째로 UN의 한국지원에 지원의사를 비췄습니다. 태국은 전쟁이 발발하고 5일 후인 6월 30일, 태국의 주 생산물인 쌀을 4만 톤이나 제공하며 유엔 안보리의 결의에 지지를 보냈습니다. 유엔 회원국 중에서 가장 처음으로 물자지원에 대한 의사를 밝혔습니다.
태국군은 참전을 하기 위한 준비가 지연되면서 결국 1천 명에 가까운 1개 대대의 육군병력을 한국으로 파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택국은 육·해·공군을 모두 파견한 국가입니다. 태국군은 중공군과의 3번에 걸친 전투를 백병전과 역습으로 물리쳐나가며 끝까지 고지를 지켜냈습니다. 이러한 과정으로 태국군은 '작은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필리핀
필리핀은 독립을 한 이후 공산반란군과 교전상태에 있던터라 국내의 정세가 불안했음에도 전차 17대, 1개 연대 전투단을 파병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미국과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지상군을 보내온 나라입니다.
필리핀 대대는 모두 미군측이 제공하는 무기로 무장을 하고 1950년 9월 20일 한국에 도착하여 10일동안 적응 훈련을 해냈고, 후방 쪽의 게릴라를 소탕하기 위한 작전에 투입된 후 전선에 뛰어들었습니더.
호주
호주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종결 후 1만 5천 명이라는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중에서 1개 대대를 파견하기로 했습니다. 유엔 한국위원단 회원국이었던 호주는 남북한의 동향을 파악, 감시를 하기 위해 유엔에서 파견한 군사조사단에 유일하게 두 명의 장교를 파견했었기 때문에 남한의 방어태세 상태와 북한의 침공위협을 누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호주 제3대대는 사리원 전투에서 적극적으로 후퇴 하는 북한군을 격멸하면서 작전속도를 높였고, 이후 영유리 전투와 박천 전투, 가평 전투 등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 했습니다.
한국전 참전국 의료지원국가 6개국
스웨덴
북유럽 스칸디나비아반도에 위치한 스웨덴에서 조직된 의사 10명, 간호사 30명, 기타 행정 등의 요원을 포함한 160명의 의료지원단은 미국을 제외하고 UN 의료지원국 중에서 최초로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스웨덴은 중립정책을 표방하는 영세중립국이었으나 1개 야전병원단의 파견의사를 밝혔고 한국전이 시작되고 약 2달 후인 1950년 8월 28일, 야전병원단은 스톡홀름을 출발하여 1950년 9월부터 1957년 4월 철수를 할 때까지 무려 6년 6개월 이라는 기간 동안 남한을 지원하는 등 6·25전쟁에 파견되었던 의료지원부대 중에서 제일 오랫동안 한국에 머물면서 수많은 중환자들을 치료하는데 전념했습니다.
인도
중립노선 국가인 인도는 유엔의 민간인 구호결의에 찬성하면서 의료지원부대를 파견할것을 결정했습니다. 제60야전병원은 란가라지 중령이 지휘 아래 1950년 11월 20일 부산으로 상륙하여 영국 제27여단을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인도의 야전병원은 굉장히 수준 높은 의술을 발휘해주었고, 이로인해 한국 정부 등으로부터 많은 훈장을 받게 되었습니다.
덴마크
덴마크 유엔 회원국 중에서 가장 처음으로 한국전 지원의사를 밝힌 국가 입니다. 병원선 유틀란디아(Jutlandia)호는 1951년 1월 23일 함머리치(Kai Hammerich) 준장의 지휘 아래 덴마크를 떠났고, 전장에 도착해서 많은 환자들을 진료해주었습니다. 이 병원선은 8개월마다 본국 덴마크로 귀국해서 재정비를 하고 다시 파견되면서 꾸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노르웨이
노르웨이 정부에서는 해상운송지원을 제의했고 적십자를 통하여 각종 지원금과 옷가지 등을 보내왔습니다. 노르웨이 적십자가 구성한 이동 외과병원은 1951년 5월 31일 노르웨이를 출발하여 한국에 도착한 후 동두천을 거점으로 미 제1군단을 직접 지원하면서 부상자들을 치료했고, 군인과 민간인들을 치료하기위해 외래환자 진료소 또한 설치하고 운영했습니다.
이탈리아
6.25전쟁이 발발할 당시 이탈리아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창설국이었지만 유엔 회원국은 아니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빈번한 내각 경질로 인해 국정이 불안한 상태였지만 적십자연맹의 요청에 의해 의료지원부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950년 10월 16일 이탈리아 제68적십자병원이 자국을 떠나 1개월 만에 한국에 도착 할 수 있었고, 부산에서 부터 시작한 이탈리아 제68적십자병원은 1950년 12월 서울까지 이동해서 1953년 정전협정 이후에도 1년간 머물면서 치료를 계속해주었습니다.
독일
독일은 당시 유엔 비회원국이었지만 한국전을 위한 의료지원 활동을 하였습니다. 서독 정부는 전쟁이 끝난 뒤인 1953년 4월 야전병원을 파견할것을 미국과 유엔에 제의했고, 1954년 5월 ~ 1959년 3월 까지 부산에 적십자 병원을 설립하여 운영하였습니다. 5년간 서독 적십자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환자는 입원환자 및 외래환자를 포함하여 약 30만명 이상 입니다.
한국전 625 참전 16개국 22개국 / 한국전쟁 유엔 (UN) 참전국 / 의료지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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